AW20  

'empathy'

 -Behind the scene-


Part. 1

외침과 저항 


 거대한 민중이 단일하게 외치는 목소리는 언제나 뜨겁다. 하나의 생각을 공유하는 대중의 단합된 외침은 전파력이 크다. 비무장한 시민들이 완전 무장한 군인들에게 맨몸으로 맞서는 행위는 무모해 보이지만 그 모습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 압도적인 물리력 차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굴복할 수 없다는 각오를 보기 때문이다. 총과 칼은 절대 신념을 이길 수 없다는 당당함에서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품격과 기개를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침은 같은 신념을 공유하는 군중들의 조직화된 저항으로 표출되곤 했다. 그리고 이 저항은 인간을 한 단계 더 성숙한 존재로 발전시켰다. 불평등에 대한 저항, 반인륜에 대한 저항, 비인간성에 대한 저항 등, 인류의 의식수준을 온전하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끌어올린 사건에는 항상 사회 구성원들의 집단화된 저항이 있었다. 그리고 이 저항은 왕이나 귀족 같은 소수 특권계층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들의 저항이야말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거대한 힘이었다. 


 이 지점에서 AW20 컬렉션은 출발되었다. 그리고 그 출발은 아래와 같은 질문들과 함께 한 걸음씩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왜 저항하는 것일까’ 

 ‘무엇이 이들을 담대하게 만드는 것일까’ 

 ‘목숨을 걸고서라도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존엄과 공감  

 인류의 정신 사조를 완벽하게 새로운 단계로 뛰어 오르게 했던 그들의 외침은 관습, 관례, 구체제에 종언을 고하는 행위였다. 이 외침은 수직적 사회구조가 수평적 사회구조로 이행하고 있음을 알리는 전주곡이었고 가치체계의 대전환을 암시하는 기적소리였다. 그들의 목소리는 계급사회 속에 잠들어 있던 인간의 지성을 깨워 놓았다.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존엄성’에 우열 따위는 존재하지 않음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에 개인차가 없듯이 그 존엄이 위협받을 때 느끼는 고통, 슬픔, 분노에도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것에 눈 뜨게 했다.

 어떤 누구도 고통이나 아픔, 슬픔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슬픔, 아픔, 고통을 싫어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이를 싫어한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인간이 느끼는 슬픔이나 아픔, 고통에 개인 별로 차등을 둘 수 없으며 타인의 아픔과 슬픔이 나의 아픔과 슬픔에 견주어 보잘 것 없는 감정일 수도 없다. 이러한 사실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이성의 영역에서만 인지할 때 발생한다. 이성의 필터링은 통과하였지만 감성의 영역으로까지 내재화가 되지 않았을 때, 인간들 사이에서는 괴리감이 형성된다. 분노한 민중들의 외침은 결국 거기에 방점이 있었다. 즉, 그들의 외침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그저 텍스트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의 무게감을 마음으로 느껴달라는 목소리였다. 인간의 존엄성은 모두에게 균등하고, 어떤 누구도 아픔을 원치 않는다는 점을 머리로 이해했다면 그 이해한 바를 가슴으로도 공감 해달라는 간절한 요구였다.

에쏘피의 aw20은 이 공감 에 대한 이야기다.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인간 사회에서는 수 많은 갈등과 대립이 발생한다. 에쏘피는 그 원인을 공감 의 부재에서 찾았다. 그리고 에쏘피만의 언어로 해석된 공감 을 aw 20 컬렉션에 담아냈다.

공감 -> 비우기 -> 끝


 감정의 공유가 가능하려면 타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내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을 위한 감정적 기제로 채워진 내면에는 다른 사람의 아픔, 고통, 슬픔이 자리잡을 공간이 없다. 타인과 소통하고 그들이 느끼는 바를 공유할 수 있으려면 자기 내면에 비워진 공간이 있어야 한다. 

자아로 가득 찬 내면에서는 타인으로 향하는 길을 설계할 수 없다. 그 길을 설계하기 위해선 자기 내면에 대한 구속력을 해체해야 한다. 본인에게만 매어 있는 자신의 내면이 타인에게도 향할 수 있도록 움켜잡고 있던 손을 펴 주어야 한다. 그제서야 비로소 자기 안에 타인의 감정을 담을 수 있다. 이는 ‘나’와 ‘나의 내면’과의 관계가 일정수준의 끝 을 맞이하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래도 괜찮다. 이를 통하여 ‘타인’과 연결된 나는 더 크고 풍부한 나로 성장할 테니 말이다.


끝 -> 정지 


우리는 무엇을 ‘끝’이라고 부르는가. 길의 끝. 일의 끝. 하루의 끝. 1년의 끝. 삶의 끝. 이러한 ‘끝’ 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연속성이 종료되는 지점으로 바라봤다. 계속적으로 이어져 오던 상태가 어느 순간 끊겨 버린 지점. 관성의 법칙대로 일정한 운동상태를 지속해 오던 것이 시간상의 한 좌표를 기준으로 그 상태가 멈춰버린 지점.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끝’이다. 연속성, 지속성이 차단당하고 갇혀버린 그 지점이 내가 생각하는 ‘끝’이다.

 관성이 더 진행되지 못하고 막혀버린 상태에는 운동 또는 형태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시간적인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위의 사진 처럼 호박 안에 갇혀 버린 모기에게는 시간의 관성(일정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시간의 성질)이 막혀버린 것과 같다. 시간은 이 호박이 생긴 이후로도 수천만년이 흘렀지만 그 안의 모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 입장에서, 모기에게는 시간이 정지 해 버린 것과 같다. 바깥 세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가 있었지만 호박에 갇힌 모기는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그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마치 보고 있던 영화를 일시 정지 버튼을 눌러서 정지 시켜버린 것 처럼 말이다.



정지 ->기다림

‘정지’란 말 그대로 멈추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멈추어 있는 것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수 많은 조형물을 포함하여, 나무, 바위, 산 등 우리 주위에는 정지상태로 있는 물체들이 너무나 많다. 뿐만 아니라 자동차나 기차, 비행기처럼 움직이게끔 만들어진 기계들도 때에 따라선 정지해 있기도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간은 움직이는 동물이지만 그렇다고 항상 움직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걸을 때도 있고 뛸 때도 있다. 그러나 한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도 있다. 이러한 인간의 정지 상태는 보는 관점에 따라 휴식으로 비춰질 수도 있고, 몸의 오작동 또는 무작동(아픈상태)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기다림 으로 보았다.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다면 우리는 약속한 시간과 장소에서 상대방을 기다린다. 내 주위를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을 꼼짝 않고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사소한 움직임들은 있겠지만 큰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은 일시 정지와 마찬가지이다.



기다림-> 상호의존성-> 중독 

‘기다림’이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대상을 상정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기다리는 사람과 기다려지는 사람, 둘 중 하나만 없어도 ‘기다림’이라는 단어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개념이 되고 만다. 이렇게 항상 쌍으로 존재하는 사람, 사물 등을 우리는 ‘짝’, ‘쌍’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짝’ 또는 ‘쌍’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개별적 의미는 ‘무’ 에 가깝다. 그들 하나 하나가 실체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개별로서는 존재 의미를 온전히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쌍’은 늘 하나의 묶음으로써 가게 된다. ‘1+1=2’ 와 같은 산술적 계산은 이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낱개로서의 단순합이 묶음으로 존재할 때의 밸류값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있을 때에 비로소 자신의 존재도 의미를 부여받는 이러한 ‘쌍’의 존재들은 하나로 그룹지어졌을 때에 완벽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고, 그러한 이유로 이 둘의 관계는 굉장히 상호의존적 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동전의 양면과 같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는 존재할 방법이 없다. 자신의 존재가 증명되려면 상대방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 이들은 서로에게 중독 이라도 된 듯 묶여 있다.

하나에 중독된 사람들, 하나에 몰입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무엇을 바라보든 그들의 눈에 실제로 들어오는 것은 자신들이 중독된 대상이다. 현재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든, 또 어떠한 행동양식을 요구 받든 그들은 자신들이 중독된 대상만을 떠 올리게 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이 중독된 대상만을 ‘반복’해서 찾게 되고, 결과적으로 중독된 행위를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반복 은 삶의 전반으로 확장 되어 간다.

1. 공감-> 확장

이렇듯, 공감 이라는 컨셉은 에쏘피가 바라보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에 의해 디벨롭되어 확장 반복 이라는 디자인적 해석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도출된 두 가지 개념 중, 확장이라는 개념은 심(seam)의 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옷은 여러 패턴 피스들의 결합으로 완성되어지는데 이 패턴 피스들이 결합되는 곳을 심(seam)이라고 명명한다. 즉, 심은 패턴들 사이의 경계선이면서 한 패턴의 끝이기도 하다. 만약 옷의 패턴이 이 심을 넘어 원래의 영역 바깥으로까지 나가게 된다면… 패턴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심이 원래의 위치에서 움직여 더 먼 곳에 위치하게 됐다면… 이는 옷 전체에서 어느 한 영역의 면적이 증가함을 의미하며, 옷 전체에서 갖는 해당 영역의 비율이 증가함을 의미한다. 즉, 확장 인 셈이다.  


확장 -> 노출

 또 다른 접근법으로, 옷의 구성요소들 중 ‘쌍’으로 존재하는 피스들로 한정시켜서 확장의 개념을 적용해 보았다. 예를 들어, 셔츠의 카라는 두장의 패턴 피스(Under Collar, Top Collar)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카라들에는 각각 심지(Fusing)가 접착되어 카라의 형태와 강도를 유지시켜 준다. 만약, 이 두 장의 카라 중 Top Collar 밑에 위치하게 되는Under Collar 만 확장시킨다면 그 결과는 심지의 노출로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노출 이라는 아이디어를 셔츠의 커프, 자켓의 페이싱(facing) 등에 디테일로 반영하였다. 


2. 공감-> 반복

 ‘공감’이라는 주제를 에쏘피만의 시각으로 옷 위에 풀어낸 마지막 방법이 반복 이었다. 무언가에 중독된 사람들은 특정 행동을 되풀이한다. 알콜에 중독된 사람은 계속하여 알콜을 찾게 되고, 휴대폰에 중독된 사람은 휴대폰에만 매달려 있게 된다. 게임에 중독된 사람은 하루 일과를 게임과 시작하기도 하며, 쇼핑에 중독된 사람은 백화점, 온라인 등을 가리지 않고 쇼핑을 한다. 이러한 행동양식을 디자인적으로 풀어내었던 것이 패턴의 개수를 더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자켓의 전면부는 프론트 피스와 페이싱(facing) 피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완성되는 자켓의 앞판에, 본래 필요한 패턴의 개수보다 페이싱 피스 1장을 늘림으로써 반복의 개념을 적용하였다. 1+1로 완성되는 자켓의 앞판(front)에 패턴 피스를 1개 더 얹어서 레이어링된 디자인을 완성하였다.   




To Be Contined in SS21.